퀘 비바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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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Que viva México!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멕시코를 배경으로 제작하려다 중단된 영화이다.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멕시코에 대한 관심과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을 통해 구상되었다. 원래는 6부작 앤솔로지 영화로, 각기 다른 멕시코 민족의 하위 문화를 다루고, 멕시코 예술가에게 헌정되며, 삶과 죽음의 테마를 담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작비 문제와 에이젠슈테인의 과도한 요구로 인해 촬영이 중단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편집 시도가 있었고,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에 의해 재구성된 버전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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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 비바 멕시코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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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보 | |
제목 | 퀘 비바 멕시코! - 다 즈드라스트부이트 멕시카! |
원제 | Da zdravstvuyet Meksika! (러시아어) Que Viva Mexico (스페인어) |
다른 이름 | Long Live Mexico! (영어, '멕시코 만세!') |
이탈리아어 포스터 | Italian poster |
장르 | 다큐멘터리 드라마 |
국가 | 소련 |
언어 | 러시아어 |
제작 | |
감독 |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
제작자 | 업턴 싱클레어 메리 크레이그 싱클레어 오토 칸 케이트 크레인 그라츠 |
각본 |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원작)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 (추가 자료) |
내레이터 |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
음악 | (정보 없음) |
촬영 | (정보 없음) |
편집 | (정보 없음) |
배급사 | 모스필름 |
개봉 및 상영 시간 | |
개봉일 | 1979년 11월 (미국) |
상영 시간 | 90분 |
기타 | |
예산 | (정보 없음) |
2. 제작 배경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영화 작업을 하기 위해 미국에 왔으나, 찰리 채플린과 파라마운트 임원들이 제안한 여러 프로젝트가 무산된 후 계약이 해지되었다. 에이젠슈테인은 소련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업튼 싱클레어와 그의 아내 메리 크레이그 킴브로 싱클레어 부부, 그리고 소규모 금융가 그룹이 그를 대신하여 에이젠슈테인이 직접 구상한 영화를 만들도록 지원했다.[3] 이들은 '멕시코 영화 신탁'이라는 법인을 설립하여 에이젠슈테인이 멕시코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도록 계약을 맺고 멕시코로 떠났다.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 영화 신탁이 제작을 중단하기 전까지 175,000~250,000피트(30~50시간 분량)의 필름을 촬영했다. 신탁은 자금 부족과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를 빨리 완성할 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제작 중단을 결정했다. 또한 에이젠슈테인은 소유즈키노로부터 소련으로 "최대한 빠른 귀국" 명령을 받았다.[3] 원래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가서 촬영한 영화를 편집할 계획이었지만, 미국 이민국은 그의 재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후 신탁은 소유즈키노와 합의하여 필름을 소련으로 보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싱클레어를 통해 멕시코 영화 신탁은 미국의 주요 영화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고자 했다. 몇 달 동안 찾지 못한 끝에 신탁은 독립 프로듀서 겸 배급사인 솔 레서와 계약하여 두 편의 단편 영화와 단편 주제 영화인 ''천둥, 멕시코에 쏟아지다''(Thunder Over Mexico), ''에이젠슈테인, 멕시코에 가다''(Eisenstein in Mexico), ''죽음의 날''(Death Day)을 제작했다. 이들은 모두 1934년에 개봉되었다.[3]
이후 신탁의 허가를 받아 마리 세턴의 ''태양 속의 시간''(Time in the Sun, 1939)과 같은 다른 버전이 시도되었다. 에이젠슈테인이 원래 제안했던 제목 ''¡Que viva México!''는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가 제작하고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tobak-esfir-esther/ 에스피르 토박]이 공동 편집한 버전[4]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1979년에 현대 미술관이 고스필모폰드 영화 보관소에서 여러 소련 영화와 교환하여 필름을 소련으로 보낸 지 약 10년 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79년 제11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상을 수상했다.[5] 알렉산드로프의 85분짜리 ''¡Que viva México!'' 복원판은 2001년 키노 비디오에서 DVD로 출시되었다.[6] 1998년에는 올레그 코발로프가 그의 자유 버전 "멕시코 판타지"를 출시했고, 21세기 초에 또 다른 버전이 제안되었다.
2. 1. 멕시코 영화 신탁
업튼 싱클레어와 그의 아내 메리 크레이그 킴브로 싱클레어는 소규모 금융가 그룹을 모아 '멕시코 영화 신탁'을 설립했다. 이 신탁은 에이젠슈테인이 멕시코에 관한 비정치적인 영화를 만들도록 지원했다.[3] 1930년 11월 24일에 체결된 계약에 따라,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영화를 1931년 4월까지 완성해야 했다. 또한, 이 영화는 혁명 이후 멕시코를 부정적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었으며, 멕시코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4] 촬영 기간 동안 메리 싱클레어의 남동생 헌터 킴브로가 신탁을 대표하여 에이젠슈테인과 함께 멕시코에 갔다.2. 2. 에이젠슈테인의 멕시코행
파라마운트 픽처스와의 계약이 해지된 후, 업튼 싱클레어 부부 등의 도움으로 에이젠슈테인은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 에두아르트 티세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가 촬영을 시작했다.[3] 헌터 킴브로는 멕시코 영화 신탁 측 대표로 동행했다. 이들은 멕시코에 대한 짧고 비정치적인 영화를 만들기로 계약했으며, 1931년 4월까지 완료하고 혁명 이후 멕시코를 모욕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촬영된 자료는 멕시코 정부의 검열을 받았다.3. 에이젠슈테인과 멕시코
20세기 초, 많은 유럽 아방가르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멕시코에 매료되었다.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많은 좌파와 마찬가지로,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가 1910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감명받았다"고 언급한다.[8] 그는 멕시코 혁명에서 "열렬한 이상주의"를 보았는데, 이는 에이젠슈테인 자신뿐만 아니라 1920년대 초 소련 아방가르드 전체 세대와도 가까운 것이었다.[10]
3. 1.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멕시코에 대한 관심
20세기 초,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멕시코에 매료되었다. 브르통에게 멕시코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였다.[7]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많은 좌파와 마찬가지로,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가 1910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감명받았다"고 언급한다.[8]에이젠슈테인은 1921년 잭 런던의 단편 소설 ''멕시코인''을 연극으로 각색하며 멕시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9] 영화 학자 잉가 카레트니코바는 이 작품이 아방가르드 미학의 전형적인 예라고 설명하며, "간접적으로" "그는 멕시코의 분위기를 재현했다"고 평가한다.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 혁명에서 "열렬한 이상주의"를 보았는데, 이는 "1920년대 초 소련 아방가르드 전체 세대"와도 가까웠다.[10]
1927년,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리베라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을 칭찬하며 멕시코 혁명을 위한 자신의 작품과 비교했다. 또한 고대 아즈텍과 마야 예술을 극찬하며 멕시코 예술 유산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11] 에이젠슈테인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디에고 리베라의 이야기에 의해 길러진 그 나라에 대한 관심의 씨앗은 그곳으로 여행하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자랐다"고 회고했다.[12]
3. 2. 에이젠슈테인의 초기 멕시코 경험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라틴 아메리카, 특히 멕시코에 매료되었다. 프랑스 예술가이자 초현실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앙드레 브르통에게 멕시코는 초현실주의의 화신과 같았다.[7]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많은 좌파와 마찬가지로,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가 1910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감명받았다"고 언급한다.[8] 멕시코에 대한 그의 매력은 적어도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22세였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잭 런던의 단편 소설 ''멕시코인''을 연극으로 각색하면서 "그의 예술 경력이 멕시코를 주제로 시작"되었다.[9] 영화 학자 잉가 카레트니코바는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적 사실주의가 아닌 형식적 연습, 즉 아방가르드 미학의 전형적인 예로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그녀는 "간접적으로" "그는 멕시코의 분위기를 재현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그는 멕시코 혁명에서 "열렬한 이상주의"의 한 예를 보았는데, 이는 "에이젠슈테인과 매우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초 소련 아방가르드 전체 세대와도 가까웠다".[10]몇 년 후인 1927년, 에이젠슈테인은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리베라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을 보고 이를 멕시코 혁명을 위한 자신의 화가로서의 작품과 비교하며 칭찬했다. 그는 또한 고대 아즈텍과 마야 예술과 건축의 경이로움을 묘사하면서 "멕시코 예술 유산에 대해 강박적으로 이야기했다".[11] 러시아 감독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디에고 리베라의 이야기에 의해 길러진 그 나라에 대한 관심의 씨앗은 그곳으로 여행하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자랐다"고 썼다.[12]
3. 3.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
1927년, 에이젠슈테인은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리베라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을 보고 멕시코 혁명을 위한 자신의 화가로서의 작품과 비교하며 칭찬했다. 그는 또한 고대 아즈텍과 마야 예술과 건축의 경이로움을 묘사하면서 "멕시코 예술 유산에 대해 강박적으로 이야기했다".[11] 에이젠슈테인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디에고 리베라의 이야기에 의해 길러진 그 나라에 대한 관심의 씨앗은 그곳으로 여행하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자랐다"고 썼다.[12]4. 영화의 구성 (원래 비전)
에이젠슈테인은 1930년 12월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에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거나 멕시코에 관한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없었지만, 도착 후 거의 즉시 촬영을 시작했다. 싱클레어 부부는 에이젠슈테인이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하고 줄거리는 부차적인 것으로 할 것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들은 예술적인 여행기를 원했다.[13]
당초 영화는 1931년 4월까지 완성될 예정이었으나, 에이젠슈테인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영화, 즉 각 부분이 멕시코 민족의 서로 다른 하위 문화를 다루는 앤솔로지라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정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국가의 역사, 국민, 그리고 현재까지의 사회적 진화를 포괄하는 6부작 영화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에이젠슈테인, 알렉산드로프, 티세가 수만 피트의 필름을 촬영하는 동안 각 섹션의 구체적인 내용과 연결 방식은 이후 몇 달 동안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1931년 후반, 에이젠슈테인은 이 영화를 4개의 주요 섹션과 짧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구성하는 것으로 마음속에 정했다.[13]
4. 1. 각 에피소드의 특징
현대 영화 이론가 보드웰은 각 에피소드가 고유한 스타일을 가지며, "다른 멕시코 예술가에게 헌정"되고, "어떤 근원적인 요소(돌, 물, 철, 불, 공기)에 기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4] 각 에피소드의 사운드트랙은 다른 멕시코 민요를 특징으로 할 것이었다.[15] 더욱이, 각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고, "모든 부분에서 삶과 죽음의 테마가 엮어져 죽음에 대한 조롱으로 절정에 달할 것"이었다.[14]4. 2. 보드웰의 분석
현대 영화 이론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각 에피소드가 고유한 스타일을 가질 것이고, "다른 멕시코 예술가에게 헌정"될 것이며, "또한 어떤 근원적인 요소(돌, 물, 철, 불, 공기)에 기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4] 각 에피소드의 사운드트랙은 다른 멕시코 민요를 특징으로 할 것이며,[15] 각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고, "모든 부분에서 삶과 죽음의 테마가 엮어져 죽음에 대한 조롱으로 절정에 달할 것"이었다.[14]4. 3. 싱클레어와의 갈등
에이젠슈테인은 1930년 12월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에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없었지만, 거의 즉시 촬영을 시작했다. 싱클레어 부부는 에이젠슈테인이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하고 줄거리는 부차적인 것으로 할 것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들은 예술적인 여행기를 원했다.[13] 영화는 1931년 4월까지 완성될 예정이었으나, 에이젠슈테인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영화, 즉 각 부분이 멕시코 민족의 서로 다른 하위 문화를 다루는 앤솔로지라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정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13] 이후 이 아이디어는 국가의 역사, 국민, 그리고 현재까지의 사회적 진화를 포괄하는 6부작 영화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13]현대 영화 이론가 보드웰은 각 에피소드가 고유한 스타일을 가질 것이고, "다른 멕시코 예술가에게 헌정"될 것이며, "또한 어떤 근원적인 요소(돌, 물, 철, 불, 공기)에 기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4] 각 에피소드의 사운드트랙은 다른 멕시코 민요를 특징으로 할 것이었다.[15] 더욱이, 각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커플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고, "모든 부분에서 삶과 죽음의 테마가 엮어져 죽음에 대한 조롱으로 절정에 달할 것"이었다.[14]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아이젠슈테인의 비전이 확장되면서 추가 자금 요청을 반복하게 된 싱클레어 부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에이젠슈타인은 이러한 대작을 만드는 데 관련된 경제적 현실, 제작자의 재정적 및 감정적 한계, 또는 계약 의무를 존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화의 궁극적인 유산이었고, 유사하게 중단된 소련의 에이젠슈테인 프로젝트인 ''베진 초원''에서도 반복되었다.
5. 영화의 구성 (알렉산드로프 판)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원래 의도에 따라 1979년에 영화를 재구성하여 공개했다.[16] 알렉산드로프와 토박의 1979년 판은 에이젠슈테인의 원래 비전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시도했으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프롤로그
- 산둥가
- 피에스타
- 마게이
- 솔다데라
- 에필로그
5. 1. 프롤로그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16]5. 2. 산둥가 (Sandunga)
테우안테펙에서의 결혼과 모성 등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콘셉시온과 아분디오의 구애와 결혼 과정을 보여주며, 이 과정에서 금 목걸이가 지참금으로 사용된다.[16]5. 3. 피에스타 (Fiesta)
과달루페 성모 축하 행사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투우를 묘사한다(실제 투우사 다비드 리세아가 마시엘과 그의 남동생이 출연). 이 에피소드와 다음 에피소드 사이에는 짧은 휴식이 있다.[17]5. 4. 마게이 (Maguey)
포르피리오 디아스 시대 풀케 산업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롤레타리아 세바스찬과 그의 약혼녀 마리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마리아는 세바스찬의 고용주 친구인 ''아시엔다도''에게 억류되어 학대당한다. 이때 세바스찬과 동료 노동자들은 복수를 계획한다.[18] 그들은 결국 쫓기고 총에 맞으며, 붙잡힌 사람들은 모래 속에 묻혀 기마병에게 짓밟힌다. 마리아는 풀려나 세바스찬의 시신을 끌어안는다.[18] 에이젠슈테인은 이 에피소드가 6부작 전체에 걸쳐 나타날 것이라고 싱클레어에게 반복해서 말했지만, 다른 서신에서는 별개의 온전한 에피소드로 묘사하기도 했다.5. 5. 솔다데라 (Soldadera)
멕시코 혁명 당시 남편을 따라 전투에 참여한 여성 군인들인 솔다데라의 이야기를 다룬다.[19] 이 부분은 촬영되지 않아 가장 짧으며, 정지 사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19]5. 6. 에필로그
영화 촬영 당시의 멕시코와 죽은 자들의 날 기념행사를 보여준다. 에이젠슈테인은 적어도 소련에서 상영될 버전에 대해서는 뚱뚱한 사제, 거만한 ''장군'', 걸스카우트, 축구 선수에 대한 풍자적인 장면을 사용하여 이 부분을 구성할 계획을 비밀리에 세웠다.[16]6. 제작 중단과 이후의 노력
에이젠슈테인은 파라마운트 픽처스와의 계약이 해지된 후, 업튼 싱클레어 부부의 도움으로 멕시코 영화 신탁과 계약을 맺고 멕시코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계약 조건에는 1931년 4월까지 영화를 완성하고, 혁명 이후 멕시코를 모욕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을 담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촬영된 자료는 멕시코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멕시코 영화 신탁은 에이젠슈테인이 175,000~250,000피트(30~50시간 분량)의 필름을 촬영한 후 제작을 중단했다. 신탁은 자금 부족과 에이젠슈테인의 제작 지연에 대한 불만, 그리고 소유즈키노로부터의 귀국 명령 등의 이유로 제작 중단을 결정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에서 촬영한 영화를 캘리포니아에서 편집하려 했으나, 미국 재입국이 허용되지 않았고, 신탁이 소유즈키노와 합의하여 필름을 소련으로 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3]
6. 1. 솔 레서의 단편 영화 제작
업튼 싱클레어를 통해 멕시코 영화 신탁은 주요 미국 영화 회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했다. 몇 달 동안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사람을 찾지 못한 끝에, 신탁은 결국 독립 프로듀서 겸 배급사인 솔 레서와 계약을 맺었다. 솔 레서는 이 필름에서 발췌한 두 편의 단편 영화와 단편 주제 영화, 즉 ''천둥, 멕시코에 쏟아지다''(Thunder Over Mexico), ''에이젠슈테인, 멕시코에 가다''(Eisenstein in Mexico), ''죽음의 날''(Death Day)을 제작했고, 이들은 모두 1934년에 개봉되었다.[3]6. 2. 다양한 버전의 시도
마리 세턴의 《태양 속의 시간》(Time in the Sun, 1939)과 같은 다양한 버전의 영화가 제작되었다.[3]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가 제작하고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tobak-esfir-esther/ 에스피르 토박]이 공동 편집한 이 영화는,[4] 1979년 현대 미술관이 고스필모폰드 영화 보관소에서 여러 소련 영화와 교환하여 필름을 소련으로 보낸 지 약 10년 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79년 제11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상을 수상했다.[5] 알렉산드로프의 85분짜리 《¡Que viva México!》 복원판은 2001년 키노 비디오에서 DVD로 출시되었다.[6] 1998년에는 올레그 코발로프가 "멕시코 판타지"라는 자유 버전을 출시했고, 21세기 초에 또 다른 버전이 제안되었다.6. 3. 알렉산드로프의 복원판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가 제작하고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tobak-esfir-esther/ 에스피르 토박]이 공동 편집한[4] 버전의 ''¡Que viva México!''는 1979년에 공개되었다.[3] 이 버전은 현대 미술관이 고스필모폰드 영화 보관소에서 여러 소련 영화와 교환하여 필름을 소련으로 보낸 지 약 10년 후에 개봉되었다. 알렉산드로프의 복원판은 에이젠슈테인이 원래 구상했던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영화는 1979년 제11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상을 수상했다.[5] 85분 분량의 알렉산드로프 복원판은 2001년 키노 비디오에서 DVD로 출시되었다.[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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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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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BAK, ESFIR (ESTHER) – Edited by
http://womenfilm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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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 Viva Mex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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